상실의 시대 :: 2010/03/16 23:33
누구든 공통이겠지만- 삶을 살아가다보면 자신이 그 전과는 분명 달라졌다고 느낄만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사람은 그렇게 성장하고 또 살아가는 것이다(물론 동일한 경험과 고통을 겪고도 아무런 생각 없이, 고민 없이 또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닐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딱히 숨길 것도 없이 내겐 20대 초에 겪었던 ‘사랑’이 그런 경험이었다. 난 그 경험과 고민을 통해서 어떤 내가 되었는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한국어판에 부치는 서문>을 통해 이 소설을 통해 그려내고 싶은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의 의미’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요즘은 그 격과 위치가 많이 떨어진 슬픈 시대지만 여전히 우리 삶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테마라고 생각된다. 그는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이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표현을 했다. 내 경우 사랑은 보통, 그 관계를 보듬고 상처를 보듬고 또 그 사람을 보듬는 개념으로 떠올리지만, 그는 ‘맞선다.’고 표현했다. 우린- 사랑을 통해 무엇과 맞서는가?
사람은 사랑이란 특정한 일을 떠나서라도, 살아감에 있어서 많은 관계를 일상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맺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일상적 관계가 주는 폭력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무겁다. 나와 네가 연결된 관계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서로에 대한 영향을 낳는다. 그리고 그 영향이 각자에게 끼칠 깊이는 절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요즘의 우리는 그 깊이와 무게에 대한 책임에서 스스로를 너무 자유롭게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만 상처 받지 않으면 된다.’는 사고는 진정한 지식인 혹은 자유인의 자세가 절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스운 것은 이 사회는 점차 저런 태도의 사람만이 살아남는 구조로 되어가고 있다.
어쨌든 그저 맺는 사회관계가 주는 무게도 이정도 일진데, 사랑의 관계가 주는 그것은 과연 쉽겠는가? 처음에는 그저 끌렸다. 와타나베와 난 그 상황은 다르지만. 물론 와타나베 쪽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하다. 죽은 전 친구의 애인이라니. 어쨌든 소설은 소설이니까. 난 현실이다. 그런 대단한 드라마는 없다. 그리고 그 감정에 대한 확신이 드는 순간부터 그저 그 아이를 위해 살았다. 와타나베는, 그리고 난 마음 깊은 곳에 당시에는 자신감이라 느꼈던 오만을 품고 있었다. 나오코는 분명 회복이 될 것이고 그녀를 위해 살 것이고 또 기다릴 것이란 생각 말이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그러지 못했고, 나도 그러지 못했다.
[난 나오코에게 언제까지나 널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나는 기다리지 못했죠. 결국 최후엔 그녀를 내동댕이쳤어요. 이건 누구 탓이라든가 아니라든가의 문제가 아녜요. 나 자신의 문제예요. 아마 내가 도중에서 내팽개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결국은 다가온 이별은 피할 수 없었고, 와나타베는 18년이 지난 함부르크 공항의 비행기에서 문득 그 ‘상실된 시간’을 격렬한 현기증과 서글픔으로 추억한다. 난 무엇으로 그 시간을 추억하고 있을까. 나도 마흔 즈음이 되는 순간에야 그 시간을 좀 더 이해하고 추억할 수 있는 걸까?
아프고 또 아파서 가슴을 부여잡고 울던 시간은 지났지만 종종 당시의 기억이 가진 날카로운 부분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을 때가 있다. 특정한 기분은 아니지만 정신을 못 차릴 거 같은 현기증이 몰려온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던 맹세들과 약속들은 이별이란 벽 앞에 모두 산산히 깨져버린 지금. 난 그리고 그 아이가 걷는 길에 그 기억은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을까. 내가 그 아이에게 끼친 관계의 무게를 생각하면 한 없이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와나타베는 결국 죽어버린 기즈키와 나오코의 무게를 자신이 혼자 지고 살아가지만, 보통 실제의 삶은 서로 그 무게를 나누고 살아간다. 지금의 나와 그 아이처럼. 추억 속의 우린 분명 아름답고 앞으로도 아름다울 테지만, 결국 그 아름다움은 정지된 영화 스틸컷처럼 재생되지 않을 과거의 기억이다. 이젠 ‘피가 통하는 생기 넘치는’ 누군가를 만나서- 네가 당연히 받아야할 행복을 받길. 우리가 주고받는 상실들은 마치 낙엽처럼 우리의 길 위에 쌓여 언젠가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고 믿는다.
2010.2.10 :: 2010/03/02 21:55
문득 오래전에 쓴 글들을 보고 있자면, 글시도 내용도 내것이 아닌 것 마냥 낯설어질 때가 있다. 비뚤거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데, 알량하게 허세를 부리는 것 역시 여전한데도 말이다. 이것은 비단 글 뿐만이 아니다.
그 시간 속의 '나'는 그 형체를 잃어버리고 이제 '말'만 남아있다. 지금의 내가 걸어가고 있는 것은 단단한 길 위인가 흩어지는 말 위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다리는 멈춰버렸고 그 틈에 내 말은 저 앞에 가서 흩어지고 있다. 내게 아직 그 것을 잡을 기회가 남아있다면...
비겁하지만. :: 2010/02/06 21:35
지금 내가 하는 선택들은 비겁하다.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입으로 말했던 길과는 정반대를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나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다. 어찌보면 이런게 더 욕망에 솔직한 걸지도. 다만, 개뿔 내가 주절거렸던 선배의 경험과 충고들은 다 거꾸로 화살이 되어 지금의 날 괴롭힌다. 그냥 그것 하나가 괴로울 따름이다. 지금 가는 길은 누굴 탓할 것도 없이 내가 선택한거니까.
오랜 시간 전의 내가 부럽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의 내가 너무 그립다.
이런 기분을 안고 난 지금을 걸어간다.


